J. 리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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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 리 톰슨은 1914년 영국에서 태어나, 극작가와 영화 감독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에 극작가로 활동하며, 1935년에는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각본가로 복귀하여 1950년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1950년대 영국에서 다양한 사회파 드라마와 액션 영화를 연출하며 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대에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나바론 요새》, 《공포의 곶》 등의 작품을 연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찰스 브론슨과 여러 작품을 함께 작업했다. 2002년 캐나다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도버 칼리지에서 수학한 J. 리 톰슨은[7] 어린 시절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희곡 ''이중 오류''가 193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영국 인터내셔널 픽쳐스(BIP)에 각본가로 고용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 시기 캐럴 리드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자메이카 여관》(1939년)에서 각본 고문을 맡기도 했다.
톰슨은 RAF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후방 총좌 및 무선 통신사로 복무했다.
1950년대 중반, 톰슨은 서스펜스, 코미디, 뮤지컬, 사회파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영국 영화계에서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에는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쉬 픽쳐 코퍼레이션(ABPC)에서 다시 각본가로 활동했다. 1950년 마침내 영화 ''Murder Without Crime''으로 영화 감독 데뷔를 이루었으나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감독 경력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작품은 1953년작 ''The Yellow Balloon''이었으며, 이후 1954년 조앤 헨리(훗날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The Weak and the Wicked'' 등을 연출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스펜스, 코미디, 뮤지컬, 사회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연출하며 영국 영화계에서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2. 1. 초기 생애
톰슨은 1914년 8월 1일 영국 브리스틀의 교외인 웨스트버리온트림에서 태어났다.[7] 그의 가족은 극장과 관련이 있었다. 톰슨은 도버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극장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에는 노팅엄 레퍼토리 극단에서 배우와 무대 담당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서리주 크로이던의 레퍼토리 극단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여가 시간에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희곡 중 하나인 ''살인이 일어나는가?''는 1934년 크로이던에서 공연되었다. 두 번째로 상연된 희곡 ''이중 오류''는 1935년 런던 웨스트엔드의 포춘 극장에서 잠시 공연되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이미 40편의 희곡을 썼다고 한다.[8][9] 톰슨의 작품을 활용하기 위해 1만파운드 가치의 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10]
톰슨은 자신이 직접 연기할 역할을 쓰기도 했지만, 연출진이 그에게 해당 역할을 맡을 의향이 있는지 묻자 "물론 아닙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다면 다시는 연기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다시는 연기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21]
그의 희곡 ''이중 오류''가 1935년 웨스트엔드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톰슨은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에 각본가로 고용되었다. 이 시기 그는 캐럴 리드 감독의 영화 ''Midshipman Easy''(1935년)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자메이카 여관》(1939년)에서는 각본 고문을 맡았다.
2. 2. 극작가로서의 활동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톰슨은 도버 칼리지에 입학한 후,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범죄극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희곡인 "''Double Error''"가 1935년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상연되었고, 이 작품의 영화 판권은 100GBP에 구매되었다.[11] 이를 계기로 그는 영국 인터내셔널 픽쳐스 (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 BIP)에 고용되어 엘스트리 스튜디오의 시나리오 작가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 캐럴 리드 감독의 영화 '미드쉽맨 이지'(Midshipman Easy, 1935)에 배우로서 작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톰슨의 첫 각본 크레딧은 자신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영화 '어리석음의 대가'(The Price of Folly, 1937)였다. 그는 또한 '화려한 밤'(Glamorous Night, 1937)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자메이카 여관》(''Jamaica Inn'', 1939)에서는 대사 코치 또는 각본 고문으로 참여했다.
이후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쉬 픽쳐 코퍼레이션 (Associated British Picture Corporation, ABPC)에서 '미들 워치'(The Middle Watch, 1940)와 '피카딜리 동쪽'(East of Piccadilly, 1941)의 각본을 썼다.
2. 3. 영화계 입문: 각본가 및 대사 코치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도버 칼리지에 입학한 후,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범죄극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희곡 "''Double Error''"가 1935년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영국 인터내셔널 픽쳐스 (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 BIP)의 엘스트리 스튜디오 시나리오 작가 부서에 고용되었다. 이 희곡의 영화 판권은 100GBP에 판매되었다.[11]
BIP 재직 중 캐럴 리드 감독의 영화 ''Midshipman Easy'' (1935)에 단역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각본가로서 그의 첫 크레딧은 자신의 희곡을 각색한 '어리석음의 대가' (''The Price of Folly'', 1937)였다. 또한 '화려한 밤' (''Glamorous Night'', 1937)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으며,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자메이카 여관》 (''Jamaica Inn'', 1939)에서는 대사 코치를 맡았다.
이후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쉬 픽쳐 코퍼레이션 (Associated British Picture Corporation, ABPC)으로 옮겨 '미들 워치' (''The Middle Watch'', 1940)와 '피카딜리 동쪽' (''East of Piccadilly'', 1941)의 각본을 썼다.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4. 전후 경력
이후 알렉산더 매켄드릭 감독의 뒤를 이어 메이저 스튜디오 컬럼비아 픽처스가 제작한 A급 액션 대작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년)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할리우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톰슨에게 제34회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으며, 작품 자체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당시 침체기를 겪던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의 재기를 돕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톰슨은 그레고리 펙과 《공포의 곶》(''Cape Fear'', 1962년), 《매케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년), 《0의 결사권》(''The Chairman'', 1969년) 등 여러 작품에서 협업을 이어갔다.
《나바론 요새》 이후에도 그는 액션 영화(《매케나의 황금》), 서스펜스(《공포의 곶》), 사극(《부리바 대령》)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꾸준히 발표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혹성탈출 4 - 노예들의 반란》(''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1972년)이나 《해피 버스데이 투 미》(''Happy Birthday to Me'', 1981년)와 같이 중규모의 B급 영화 제작에 주력하게 되었으나, 평가와 흥행 면에서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0년대에는 주로 배우 찰스 브론슨과 함께 여러 편의 액션 영화를 감독했으며, 1989년 작 《금지된 손길》(''Kinjite: Forbidden Subjects'')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척 노리스와 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주연한 버디 영화 《파이어워커》(''Firewalker'', 1986년)는 미국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4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감독 은퇴 후에도 프로듀서나 기술 고문으로 영화 제작에 간헐적으로 참여했으며, 2002년 8월 30일, 캐나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울혈성 심부전으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1. 각본가로 복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톰슨은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시와 계약을 맺고 각본가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 플레이스 포 제니퍼(1949)와 포 뎀 댓 트레스패스(1949)와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특히 후자는 배우 리처드 토드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톰슨은 리처드 토드를 스타로 만든 영화 더 헤이스티 하트(1949)에서 대사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대사 연출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일은 스타들이 대사를 따라하도록 돕는 것이었지만, 저는 또한 프런트 오피스의 스파이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어가 바뀌면 그들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통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그가 더들리 레슬리와 공동으로 집필한 희곡 휴먼 터치는 알렉 기네스가 주연을 맡아 런던의 사보이 극장에서 100회 이상 공연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4. 2. 감독 데뷔
전쟁 후 톰슨은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시와 계약하여 노 플레이스 포 제니퍼(1949)와 포 뎀 댓 트레스패스(1949)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후자는 리처드 토드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톰슨은 토드를 스타로 만든 더 헤이스티 하트(1949)에서 대사 연출을 맡았으나, 이 역할에 대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일은 스타들이 대사를 따라하도록 돕는 것이었지만, 저는 또한 프런트 오피스의 스파이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어가 바뀌면 그들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통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며 그만두었다.
같은 해, 그가 더들리 레슬리와 공동 집필한 희곡 휴먼 터치는 알렉 기네스 주연으로 사보이 극장에서 100회 이상 공연되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ABPC에서 제작한 1950년 영화 ''살인 없는 범죄(Murder Without Crime)''였다. 톰슨은 계약에 따라 이 영화를 제작했는데, 자신의 연극 ''Double Error''의 영화화 권리료로 500GBP, 연출료로 500GBP를 제안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계속 연극을 쓸 수 있도록 돈을 벌고 싶었다"고 했으나, 연출 과정에서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11]
톰슨은 "사실, 연출은 글쓰기보다 훨씬 쉬웠고, 글쓰기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그래서 영화 감독이 되었다"고 덧붙였다.[67]
''살인 없는 범죄''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는 남자의 이야기로, 톰슨 자신의 희곡 ''Double Error''를 바탕으로 각본도 직접 썼다. 이 영화는 당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후 톰슨 작품의 특징이 되는 '선한 사람의 양심과의 갈등, 외부의 악의 세력, 장기적 결과를 초래하는 비정상적인 폭력의 순간' 같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는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비난할 행동을 용납하거나 최소한 이해하기를 바랐다.[14]
톰슨이 감독으로서 처음 성공을 거둔 작품은 그가 연출하고 앤 버나비(Anne Burnaby)와 공동 각본을 쓴 ''노란 풍선(The Yellow Balloon)''(1953)이었다. 이 영화는 친구의 죽음에 우발적으로 연루된 후 범죄를 돕도록 협박받는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어서 더크 보가드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더 나은, 더 나쁜(For Better, For Worse)''(1954)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또한 1954년에는 조앤 헨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The Weak and the Wicked''를 감독했으며, 헨리는 후에 톰슨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5. 영국에서의 감독 활동 (1950년대)
1950년, ABPC에서 자신의 희곡을 각색한 《살인 없는 범죄(Murder Without Crime)》를 연출하며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11] 처음에는 연극 집필 자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연출 과정에서 흥미를 느껴 영화 감독의 길을 걷게 되었다.[11][67] 초기 작품인 《노란 풍선(The Yellow Balloon)》(1953)과 여성 교도소의 삶을 그린 《약자와 악인》(The Weak and the Wicked, 1954) 등이 성공하며 감독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특히 《약자와 악인》의 흥행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5][16]
1950년대 중반, 톰슨은 ABPC와 랭크 필름을 오가며 서스펜스, 코미디, 뮤지컬, 사회파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영국 영화계에서 입지를 넓혔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 영화 《더 나은, 더 나쁜(For Better, For Worse)》(1954), 《그들이 행복한 동안》(As Long as They're Happy, 1955), 《데이지라는 이름의 악어》(An Alligator Named Daisy, 1955) 등을 만들었다.
특히 다이아나 도스가 사형수로 출연하여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밤을 견뎌라》(Yield to the Night, 1956)와 20년 결혼 생활의 붕괴를 현실적으로 묘사한 《드레싱 가운의 여인》(Woman in a Dressing Gown, 1957)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11][17] 《드레싱 가운의 여인》은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대표작이자 영국 뉴 웨이브의 전조로 평가받으며 골든 글로브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톰슨은 당시 ABPC 제작 책임자 로버트 클라크와의 관계 속에서 상업 영화와 작품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활동했다고 회고했다.[20]
1950년대 후반에는 점차 규모가 큰 액션, 모험, 스릴러 장르로 영역을 확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알렉스에서의 고독》(Ice Cold in Alex, 1958)은 BAFTA 작품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령 인도를 배경으로 한 모험 영화 《노스웨스트 프론티어》(North West Frontier, 1959)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18] 또한, 스릴러 《거리에는 나무가 없다》(No Trees in the Street, 1959)와 헤일리 밀스를 발굴한 《타이거 베이》(Tiger Bay, 1959) 등을 연출하며 장르 영화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의 성공은 톰슨이 1960년대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5. 1. 초기 성공작
톰슨이 감독으로서 처음 연출한 영화는 ABPC에서 제작한 1950년작 《살인 없는 범죄(Murder Without Crime)》였다.[11] 이 영화는 톰슨 자신의 연극 《Double Error》를 바탕으로 각본도 직접 썼으며,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Screenonline 프로필에 따르면, 이 영화는 "잘 짜여졌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선한 사람의 양심과의 갈등, 외부의 악의 세력, 그리고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비정상적인 폭력의 순간" 등 톰슨 작품의 특징적인 주제들을 담고 있었다.[14] 톰슨은 연출 계기에 대해 처음에는 연극 집필 자금을 벌기 위해서였으나, 연출 과정에서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글쓰기보다 연출이 더 쉽고 즐거웠다고 말했다.[11][67]톰슨이 감독으로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는 그가 연출하고 앤 번나비(Anne Burnaby)와 공동으로 각본을 쓴 《노란 풍선(The Yellow Balloon)》(1953)이었다. 이 영화는 친구의 죽음을 우발적으로 초래한 소년이 범죄를 돕도록 협박당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어서 더크 보가드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더 나은, 더 나쁜(For Better, For Worse)》(1954)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당시에는 《노란 풍선》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같은 해에 발표된 《''The Weak and the Wicked''》(1954)는 작가 조앤 헨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했으며, 그녀는 후에 톰슨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동안 톰슨은 서스펜스, 코미디, 뮤지컬, 사회파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영국 영화계에서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5. 2. 사회파 드라마와 키친 싱크 리얼리즘
톰슨이 감독한 네 번째 영화인 1954년작 '약자와 악인'(The Weak and the Wicked)은 감옥 안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톰슨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조안 헨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했으며, 톰슨은 앤 번나비와 다시 한번 각본 작업을 함께 했다. 글라이니스 존스와 다이아나 도스가 출연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15] 이 영화의 성공으로 톰슨은 영국의 주요 감독 중 한 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16]이후 톰슨은 잭 뷰캐넌의 코미디 영화 '그들이 행복한 동안'(As Long as They're Happy, 1955)과 다이아나 도스, 도널드 신든이 출연한 '데이지라는 이름의 악어'(An Alligator Named Daisy, 1955)를 연출했다. 다시 ABPC로 돌아와서는 '밤을 견뎌라'(Yield to the Night, 1956)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다이아나 도스가 사형수로 출연하는 사형 제도에 비판적인 이야기로, 다시 여성 죄수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톰슨은 당시 ABPC 영화 제작 패턴에 대해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당 흥행 위주의 평범한 작품 두 개"였다고 회상하며, 제작 책임자인 로버트 클라크와의 관계를 언급했다. "만약 제가 제작 책임자인 로버트 클라크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말이죠. 그는 제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마지못해 동의하곤 했죠. '알았어요.' 그는 결국 말하곤 했어요. '해야 한다면 하세요. 하지만 돈은 못 벌 겁니다.' 저는 그를 정말 존경했어요. 그는 감독에게 어느 정도 재량을 주었죠."[20]
J. B. 프리스틀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굿 컴패니언스'(The Good Companions, 1957)는 비교적 가벼운 작품이었지만, 한 부고에 따르면 톰슨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훌륭한 조연 배우들을 캐스팅했으며, 활기찬 안무로... 당시 영국 영화계에서 흔치 않았던 장르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사례였다."[67]
이브온느 미첼, 앤서니 퀘일, 실비아 심스가 출연하고 테드 윌리스가 각본을 쓴 '드레싱 가운의 여인'(Woman in a Dressing Gown, 1957)은 20년간 이어온 결혼 생활의 파탄을 현실적으로 그렸다.[11]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57년 영국 박스 오피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중 하나였다.[17] 몇몇 현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영국 뉴 웨이브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언급한다. 이 영화는 1958년 골든 글로브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5. 3. 액션 영화로의 전환
톰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프리카를 횡단하는 영국군 부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알렉스에서의 고독''(''Ice Cold in Alex'', 1958)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존 밀스, 실비아 심스, 안소니 퀘일, 해리 앤드루스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BAFTA에서 영국 영화 작품상을 포함하여 3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어서 케네스 모어와 로렌 바콜이 출연하고 영국령 인도에서 벌어지는 모험을 그린 ''노스웨스트 프론티어''(''North West Frontier'', 1959)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1959년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중 하나였다.[18] 같은 해 스릴러 영화 ''거리에는 나무가 없다''(''No Trees in the Street'', 1959)와 존 밀스 및 그의 딸 헤일리 밀스가 출연한 ''타이거 베이''(''Tiger Bay'', 1959)도 연출하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지만, 점차 액션과 서스펜스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본격적인 전환점은 알렉산더 매켄드릭 감독의 후임으로 메이저 스튜디오의 A급 액션 대작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의 감독을 맡으면서 찾아왔다. 이 작품을 통해 톰슨은 할리우드에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바론 요새》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톰슨에게 제34회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고, 작품 자체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또한,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의 경력에 있어 중요한 부활작이 되기도 했다.
《나바론 요새》의 성공 이후, 톰슨은 액션과 서스펜스 장르에 더욱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그레고리 펙과 다시 협력하여 서스펜스 영화 《공포의 곶》(''Cape Fear'', 1962), 서부 액션 영화 《매케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 스릴러 《0의 결사권》(''The Chairman'', 1969) 등을 연출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사극 《부리바 대령》(''Taras Bulba'', 1962)과 같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혹성탈출 4 - 노예들의 반란》(''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1972)이나 《내 생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Happy Birthday to Me'', 1981)와 같은 중규모의 B급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났으며, 작품들의 평가나 흥행 성적은 이전 시기에 비해 다소 부진한 경향을 보였다. 1980년대에는 액션 스타 찰스 브론슨과 함께 여러 편의 액션 영화를 감독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흥행작으로는 척 노리스와 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주연한 버디 액션 영화 《파이어워커》(''Firewalker'', 1986)가 있으며,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4위를 기록했다. 톰슨의 마지막 연출작은 찰스 브론슨 주연의 액션 스릴러 《금지된 손길》(''Kinjite: Forbidden Subjects'', 1989)이다.
6. 할리우드 진출 (1960년대)
알렉산더 맥켄드릭 감독을 대신하여 연출한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의 국제적인 성공은 톰슨에게 할리우드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주연의 심리 스릴러 《공포의 곶》(Cape Fear, 1962)을 연출하며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내용 때문에 당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제작자 해럴드 헤흐트와 함께 율 브린너를 주연으로 한 코사크 서사시 《타라스 불바》(Taras Bulba, 1962)를 감독했다.[24] 1962년에는 미리쉬 형제와 4편의 영화 제작 계약을 맺었으며,[25] 그 첫 작품으로 다시 율 브린너가 주연을 맡은 마야 문명 배경의 서사극 《태양의 왕》(Kings of the Sun, 1963)을 연출했다.
톰슨은 코미디 장르에도 손을 대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왓 어 웨이 투 고!》(What a Way to Go!, 1964)[26]와 《존 골드파브, 플리즈 컴 홈》(John Goldfarb, Please Come Home, 1965)[29]을 만들었다. 잠시 영국으로 돌아가서는 미리쉬 형제를 위해 《애쉬로부터의 귀환》(Return from the Ashes, 1965)을 제작했고,[30] 건강 문제로 하차한 마이클 앤더슨 감독을 대신하여 데이비드 니븐 주연의 컬트 스릴러 《악마의 눈》(Eye of the Devil, 1967)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32]
1960년대 후반에는 전쟁 영화 《윈터가 오기 전에》(Before Winter Comes, 1968)를 선보였다. 《나바론 요새》의 성공을 함께했던 제작진 및 배우들과 다시 뭉쳐 서부극 《매케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을 만들었으나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35] 그레고리 펙과 재회한 스파이 영화 《더 체어맨》(The Chairman, 1969) 역시 흥행 부진을 겪었다.
톰슨은 1968년 인터뷰에서 "솔직히 말해서, 저는 꽤 끔찍한 작품들을 몇몇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문제는 제가 몇몇 형편없는 각본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충분히 강하지 않았습니다... 글쓰기가 근본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당시의 어려움을 인정했다.[20] 일부에서는 이 시기 그의 창작력 저하가 개인적인 관계 변화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37]
6. 1. 《나바론 요새》와 국제적 명성
톰슨은 알렉산더 맥켄드릭 감독의 막바지 교체 투입으로 제작된 영화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영화 제작 동안 그의 진취적인 태도는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으로부터 '마이티 마우스'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공동 출연한 앤서니 퀸은 톰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는 촬영을 해야 할 때까지 장면을 읽지 않았고, 즉흥적으로 각 샷에 접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리 톰슨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어떻게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의 창의성은 관습을 거부하고, 영화 제작의 기존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확립하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무형성 속에서 그가 유지하고 육성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 즉 그를 지탱하고 육성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를 찾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저 운 좋은 영국인이었을 뿐이고, 엉덩이에서 좋은 영화를 꺼낸 것이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 촬영된 대작 ''나바론 요새''는 톰슨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지명을 포함하여 총 7개 부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작품 자체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였다. 1961년 그는 "우선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제가 다시 예술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큰 영화 서킷에서 예술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예술 영화관에 속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나바론 요새''에 대해 "저는 캐릭터 비트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누구나 폭발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나바론 요새''의 성공으로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폴리 버겐, 로리 마틴이 출연한 심리 스릴러 영화 ''공포의 곶''(Cape Fear, 1962)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펙과 미첨이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존 D. 맥도널드의 소설 ''사형 집행인''(The Executioners)을 원작으로 한 ''공포의 곶''은 성범죄자가 어떻게 사법 제도를 조작하고 한 가족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매우 논란이 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상당 부분 삭제되었다. 이후에도 펙과는 《마켄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년)과 《0의 결사권》(''The Chairman'' 1969년)에서 함께 작업했다.
그는 워렌 비티와 클리포드 오데츠와 함께 비티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국 제작되지는 않았다. 대릴 F. 자눅과 논의했던 ''The Short Cut''과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The Living Room'', 아놀드 웨스커의 ''Chips with Everything'' 역시 마찬가지였다.
6. 2. 《공포의 곶》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폴리 버겐, 로리 마틴이 출연한 심리 스릴러 영화 ''공포의 곶''(''Cape Fear'', 1962)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주연 배우인 펙과 미첨이 공동으로 제작하기도 했다.존 D. 맥도널드의 소설 ''사형 집행인''(''The Executioners'')을 원작으로 한 ''공포의 곶''은 성범죄자가 사법 제도를 조작하여 한 가족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 당시 매우 논란이 되었으며,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상영 시 내용이 대폭 삭제되었다.
톰슨은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과 이 작품 외에도 《매케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년)과 《0의 결사권》(''The Chairman'', 1969년)에서 함께 작업했다.
6. 3. 다양한 장르 탐구
알렉산더 맥켄드릭 감독의 후임으로 연출한 제2차 세계 대전 배경의 액션 대작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61년)는 톰슨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상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톰슨 자신도 감독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침체기를 겪던 주연 배우 그레고리 펙의 경력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1년 인터뷰에서 톰슨은 "우선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합니다. ... 큰 영화 서킷에서 예술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예술 영화관에 속합니다."라고 말하며 대중적인 영화 제작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나바론 요새》의 성공 이후 톰슨은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주연의 심리 스릴러 《공포의 곶》(''Cape Fear'', 1962년)을 연출했다.[23] 존 D. 맥도널드의 소설 《사형 집행인》(''The Executioners'')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사법 제도를 악용하여 한 가족을 공포에 빠뜨리는 성범죄자를 다루었으며, 당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켜 미국과 영국에서 검열로 인해 일부 장면이 삭제되었다.
이후 제작자 해럴드 헤흐트와 함께 율 브린너 주연의 코사크 서사시 《타라스 불바》(''Taras Bulba'', 1962년)를 감독했으며,[24] 미리쉬 형제와의 계약 하에 마야 문명을 배경으로 한 서사극 《태양의 왕》(''Kings of the Sun'', 1963년)도 연출했다.[25]
톰슨은 코미디 장르에도 도전하여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왓 어 웨이 투 고!》(''What a Way to Go!'', 1964년)[26]와 《존 골드파브, 플리즈 컴 홈》(''John Goldfarb, Please Come Home'', 1965년)[29]을 만들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가 전쟁 드라마 《애쉬로부터의 귀환》(''Return from the Ashes'', 1965년)[30], 컬트를 소재로 한 스릴러 《악마의 눈》(''Eye of the Devil'', 1967년)[32], 또 다른 전쟁 영화 《윈터가 오기 전에》(''Before Winter Comes'', 1968년) 등을 연출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나바론 요새》의 제작진 및 배우들과 다시 뭉쳐 서부극 《매케나의 황금》(''Mackenna's Gold'', 1969년)[35]과 그레고리 펙과 재회한 스파이 영화 《더 체어맨》(''The Chairman'', 1969년)을 만들었으나, 이들 작품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톰슨 스스로도 1968년에 "솔직히 말해서 꽤 끔찍한 작품들을 몇몇 했다"며 좋지 않은 각본을 받아들인 것을 자책하기도 했다.[20]
1970년대 이후 톰슨은 《혹성탈출 4 - 노예들의 반란》(''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1972년)과 《혹성탈출 5 - 최후의 생존자》(''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 1973년) 같은 SF 영화 시리즈의 연출을 맡았으며, 《해피 버스데이 투 미》(''Happy Birthday to Me'', 1981년)와 같은 중저예산 B급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주로 찰스 브론슨과 함께 여러 편의 액션 영화를 감독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추적자》(''The Evil That Men Do'', 1984), 《킹 솔로몬》(''King Solomon's Mines'', 1985), 《파이어워커》(''Firewalker'', 1986), 《죽음의 소원 4》(''Death Wish 4: The Crackdown'', 1987), 《금지된 손길》(''Kinjite: Forbidden Subjects'', 1989) 등이 있다. 이 중 척 노리스와 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출연한 버디 액션 영화 《파이어워커》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7. 1970년대 이후의 활동
1970년 영국으로 돌아와 ''컨트리 댄스''를 연출한 이후, 톰슨의 활동은 점차 변화했다. 혹성탈출 시리즈의 후속편 연출을 맡기도 했으며[38], 미국 텔레비전 영화 제작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이 시기부터는 이전의 대작보다는 중소 규모의 영화나 B급 액션 영화 제작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였고, 특히 1980년대에는 배우 찰스 브론슨과 여러 편의 액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1989년 《금지된 손길》을 마지막으로 영화 감독직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프로듀서나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2년 8월 30일, 캐나다에서 휴가 중 울혈성 심부전으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 1. 《혹성탈출》 시리즈
톰슨의 소규모 영화 연출 능력은 제작자 아서 P. 제이콥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톰슨은 제이콥스와 이전에 ''왓 어 웨이 투 고''를 함께 제작한 인연이 있었다. 톰슨은 제이콥스 제작의 《혹성탈출》에 처음으로 참여 제안을 받았던 감독 중 한 명이었으며, 처음 두 편의 속편 제의는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혹성탈출 4 - 노예들의 반란》(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eng, 1972년)과 다섯 번째 작품인 《혹성탈출 5 - 최후의 생존자》(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eng, 1973년)를 연출하게 되었다. 작가 폴 덴에 따르면, 톰슨은 과거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었으나 이 영화들을 제작할 당시에는 이를 극복한 상태였다.[38]톰슨은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예산이 계속 삭감된 것에 대해 "나쁜 정책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9]
7. 2. B급 액션 영화와 찰스 브론슨
1970년대 이후 톰슨은 활동 무대를 점차 바꾸어 나갔다. 미국 텔레비전 분야에서 활동을 늘려, 텔레비전 영화인 위대한 미국 비극(1972), 제프 이스트와 폴 윈필드가 출연한 허클베리 핀(1974), 피터 프라우드의 환생(1974), 과부(1976) 등을 연출했으며, 블루 나이트(1975)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감독하기도 했다.이 시기부터 톰슨은 혹성탈출 4 - 노예들의 반란(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eng, 1972년)이나 해피 버스데이 투 미(Happy Birthday to Meeng, 1981년)와 같이 이전보다 규모가 작은 B급 영화 제작에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대체로 평가와 흥행 양면에서 부진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액션 스타 찰스 브론슨과 손잡고 여러 편의 액션 영화를 감독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이전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기의 작품 중에는 척 노리스와 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주연한 버디 무비 파이어워커(Firewalkereng, 1986년)가 미국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4위를 기록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톰슨은 1989년 찰스 브론슨과 함께한 금지된 손길(Kinjite: Forbidden Subjectseng)을 마지막으로 영화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7. 3. 기타 작품
톰슨은 미국 텔레비전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여러 텔레비전 영화를 연출했다. 1972년에는 ''위대한 미국 비극''을, 1974년에는 제프 이스트와 폴 윈필드가 출연한 ''허클베리 핀''과 ''피터 프라우드의 환생''을 연출했다. 1975년에는 TV 시리즈 ''블루 나이트''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감독했으며, 1976년에는 텔레비전 영화 ''과부''를 연출했다.같은 해인 1976년에는 희곡 ''살인에서 벗어나기''를 발표하며 극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8. 개인사
톰슨은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태어났으며, 도버 칼리지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는 플로렌스 베일리로, 1935년 톰슨이 20세일 때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피터(1938–1997)와 딸 레슬리가 있었다. 아들 피터는 아버지의 여러 영화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딸 레슬리는 톰슨 사망 후에도 생존했다.[59] 톰슨과 베일리는 1957년에 이혼했다.
두 번째 아내는 작가 조안 헨리로, 1958년에 결혼했다. 헨리는 톰슨과 함께 "약자와 악인"과 "밤으로 굴복하라"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톰슨은 배우 수잔 햄프셔와 관계를 가지면서 헨리를 떠났다. 1962년 3월, 칼럼니스트 헤다 호퍼는 톰슨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헨리와 햄프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60] 톰슨 역시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했다.[61] 하지만 같은 해 9월, 호퍼는 톰슨과 햄프셔의 관계가 끝났다고 전했다.[26] 톰슨과 헨리는 1960년대 후반에 이혼했다.[62]
1962년 11월, 톰슨은 배우 셜리 앤 필드에게 청혼했으나, 필드가 처음에는 승낙했다가 마음을 바꿨다고 밝히기도 했다.[63]
그의 세 번째 아내는 페니였으며, 톰슨이 사망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톰슨은 2002년 8월 30일, 캐나다에서 휴가 중 울혈성 심부전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9. 사망
톰슨은 감독 은퇴 후에도 프로듀서나 기술 고문으로 영화 제작에 계속 관여했다. 2002년 8월 30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수크(Sooke)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 중 울혈성 심부전으로 쓰러져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 작품 목록
- ''The Price of Folly'' (1937)
- ''The Middle Watch'' (1940)
- ''Last Holiday'' (1950) (J. B. 프리스틀리 각본에 추가 대사 기여)
- ''범죄 없는 살인'' (Murder Without Crime) (1950)
- ''노란 풍선'' (The Yellow Balloon) (1953)
- ''더 나아지든, 더 나빠지든'' (For Better, for Worse) (1954)
- ''약자와 악인'' (The Weak and the Wicked) (1954)
- ''그들이 행복한 동안은'' (As Long as They're Happy) (1955)
- ''데이지라는 이름의 악어'' (An Alligator Named Daisy) (1955)
- ''밤에 굴복하다'' (Yield to the Night) (1956)
- ''좋은 동료들'' (The Good Companions) (1957)
- ''드레싱 가운을 입은 여자'' (Woman in a Dressing Gown) (1957)
- ''알렉스 안의 얼음처럼 차가운'' (Ice Cold in Alex) (1958)
- ''노스웨스트 프론티어'' (North West Frontier / Flame Over India) (1959)
- ''거리에 나무가 없다'' (No Trees in the Street) (1959)
- ''타이거 베이'' (Tiger Bay) (1959)
- ''나는 별을 쏜다'' (I Aim at the Stars) (1960)
- ''나바론의 요새'' (The Guns of Navarone) (1961)
- ''공포의 곶'' (Cape Fear) (1962)
- ''타라스 불바'' (Taras Bulba) (1962)
- ''태양의 왕'' (Kings of the Sun) (1963)
- ''왓 어 웨이 투 고!'' (What a Way to Go!) (1964)
- ''존 골드파브, 플리즈 컴 홈'' (John Goldfarb, Please Come Home) (1965)
- ''잿더미에서 돌아오다'' (Return from the Ashes) (1965)
- ''악마의 눈'' (Eye of the Devil) (1967)
- ''매케나의 황금'' (Mackenna's Gold) (1969)
- ''겨울이 오기 전에'' (Before Winter Comes) (1969)
- ''회장'' (The Chairman / 0의 결사권) (1969)
- ''컨트리 댄스'' (Country Dance) (1970)
- ''혹성탈출 2 - 지하세계의 대결''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 혹성 탈출 4 - 노예의 반란) (1972)
- ''어 그레이트 아메리칸 트래지디'' (A Great American Tragedy) (1972) (TV)
- ''혹성탈출 3 - 최후의 생존자''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 / 혹성 탈출 5 - 최후의 생존자) (1973)
- ''허클베리 핀'' (Huckleberry Finn) (1974)
- ''피터 프라우드의 환생'' (The Reincarnation of Peter Proud / 리인카네이션) (1975)
- ''위도우'' (Widow) (1976) (TV)
- ''세인트 아이브스'' (St. Ives) (1976)
- ''더 화이트 버팔로'' (The White Buffalo) (1977)
- ''더 그리스 타이쿤'' (The Greek Tycoon) (1978)
- ''더 패세지'' (The Passage) (1979)
- ''해피 버스데이 투 미'' (Happy Birthday to me) (1981)
- ''살인마'' (10 to Midnight / 추적자) (1983)
- ''킹 솔로몬의 보물'' (King Solomon's Mines) (1985)
- ''파이어워커'' (Firewalker) (1986)
- ''머피의 법칙'' (Murphy's Law) (1986)
- ''데스 위시 4'' (Death Wish 4: The Crackdown) (1987)
- ''메신저 오브 데스'' (Messenger of Death) (1988)
- ''금지된 손길'' (Kinjite: Forbidden Subjects) (1989)
11. 수상 및 후보
wikitext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1956 | 칸 영화제 | 황금종려상 | 밤으로의 도주 | 후보 |
1957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황금곰상 | 옷을 입은 여인 | 후보 |
국제 영화 비평가상 | 수상 | |||
특별 언급 | 수상 | |||
1958 | 황금곰상 | 알렉스 안의 빙점 | 후보 | |
국제 영화 비평가상 | 수상 | |||
1959 | 황금곰상 | 타이거 베이 | 후보 |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 작품상 | 후보 | ||
북서 변경 | 후보 | |||
1961 | 골든 글로브상 | 드라마 부문 작품상 | 나바론 요새 | 수상 |
감독상 | 후보 | |||
미국 감독 조합 | 뛰어난 연출상 | 후보 | ||
아카데미상 | 감독상 |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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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or love of two women
1962-03-02
[62]
뉴스
"Obituary of Joan Henry: Debutante who went to jail for fraud but made a new life after writing a sensational bestseller about her experiences in prison"
2001-01-01
[63]
뉴스
"I'll wed Shirley Ann Says Director, but She Says No"
1962-11-28
[64]
뉴스
J Lee Thompson
2002-09-04
[65]
뉴스
J. Lee Thompson Film Director ...
2002-09-08
[66]
뉴스
Obituaries: J. Lee Thompson
2002-09-09
[67]
뉴스
"Obituary: J. Lee Thompson; Versatile director of 'The Guns of Navarone'"
200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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